[2006 광주비엔날레] 열풍 변주의 현장에 서다.
I. 들어가며 - 현대 미술에의 설렘..
추석 연휴를 빌어 가족과 함께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세계인의 예술 축제 비엔날레(biennale)로 발길을 옮겼다. 연휴라 그런지 아침부터 가족끼리 관람하러 오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나 마르크 샤갈전, 인상파거장전 등 다른 시대의 미술작품을 탐미하는 것은 종종 하는 일이었지만, 나와 같은 시기에 공존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평소와는 다른 설레임을 갖게 되었고, 많은 전시작품을 시간을 내서라도 빠짐없이 보고 싶었다. 팸플릿을 받아 열어보니 전세주제 ‘열풍변주곡’은 현대아시아의 새로운 변화에너지를 아시아 권역에 존재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열풍처럼 관객의 마음에 확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시아의 문화라.. 점점 기대되었다.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큰 전시작품이 떡 하니 들어서 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도슨트(Docent : 안내하고 설명해주는 사람)의 도움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II. 어려운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열쇠를 찾다. (갤러리 1)
관람은 생각보다 천천히 진행되었다. 도슨트의 설명도 자세했고,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소개 글을 읽다보니 5개의 갤러리 중 1개의 갤러리만 감상하는데도 2시간이 훌쩍 넘겨 버렸을 정도니 말이다.
문화란 인류의 삶을 한 데 어우를 수 있는 공존의 양식이면서 각기 다른 코드를 통해 그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관람이 진행될수록 그 코드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화관의 고유성(characteristic)을 인정해야 했고, 내가 모르고 있었던 문화적인 배경과 대화하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타문화를 열심히 이해하려는 자세로 작품과 마주하는데도, 부족한 배경지식은 나로 하여금 작품을 이해하는 데 벽을 두었던 것이다. 특히 낯선 퓨전예술을 바라보는 데서 작가의 입장에 완전히 설 수 없다는 것이 곤란하게 느껴졌다.
이 때 떠올렸던 생각이 ‘잘 그린 그림’과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4가지 관점이었다. 비록 문학작품이 아니었고, 전시된 것들 중 그림이 주를 이루는 것도 아니었으나 다양한 관점이 작품의 이해를 도왔다. 현실을 반영하는 모방론(반영론),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는 표현론, 관객들에게 효용을 주고자 하는 효용론, 외재적 관점을 떠난 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찾는 ‘절대주의적 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시관 내의 현대 미술 작품은 단 하나의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던 것이다. 작가가 처한 시대적 환경도 고려되었고, 작가의 사상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통상의 작품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표현기법과 그 방식은 작품마다 각기 달랐고, 바로 그 독특함이 매력이었다.
다양한 관점, 즉 다원주의적인 개방성을 지니고 작품을 대하니 편히 작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수학공식을 놓고 대입하여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막힌 미로에서 길을 찾은 것 마냥 행복한 일이었다.
모든 작품이 자신만의 독자성을 갖고 그 의미를 지녔지만, 빛을 이용해 그림자로 형상화되었던 작품이나 깨진 도자기들을 엮어 만든 작품, 죽은 이와의 대화를 음향효과와 더불어 작품에 투영한 것이 기억에 남고, 자신이 처한 전쟁의 현실을 담은 반영론 중심의 작품은 간접적으로나마 그 현실에 서게 했고, 보는 이의 심리(공포)를 자극하여 관객 스스로 느끼게 하는 작품도 빼놓을 수 없었다.
1부 갤러리에선 많은 시간을 두고 작품 하나하나의 의미를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메모해가며 관찰하고 있었다.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음미하고, 나도 모르는 작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III. 공간 미술과 진지하게 조우하다. (갤러리 2)
한 층을 올라가 다른 전시관에 들어섰다. 갤러리 1의 작품들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너무 즐겁게 감상을 해서인지 다른 갤러리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갤러리2는 전체적으로 갤러리 1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흥미’만 놓고 본다면 갤러리1이 단연 월등했지만, 이 갤러리는 진지하면서도 현대미술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공간의 미술이었다. 신문기사부터 사진들까지 수집해놓은 작품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품들이 공간을 이용했다. 작품 그 자체와 작품에 필요한 도구들을 작품과 합치시켰던 아래층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주변 환경 그 자체를 작품화하는 공간미술의 진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대상을 받았다는 30년간 어머니가 모든 생활품을 전시해 놓은 ‘송동’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듯 수집을 전시하기 위해서도 공간이 필요하고, 결국 공간미술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비록 수많은 관객 중 한 명이 내린 ‘조작적 정의'일지 몰라도 갤러리2는 현대미술이 그동안 보여줬던 공간성을 최대한 보여준 작품을 전시해놓은 또 하나의 공간 있었다. 현대미술은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사고방식에 기초하여 기존의 정형화된 틀과 방식을 깨뜨리는 데 그 의의를 지니는데, 주어진 공간을 활용하는 영역의 확장 또한 현대미술이 담고 있는 변화의 일부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고대나 근대의 작품들이 그림(예술작품)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미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목표인 것과는 달리, 독특한 공간예술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미술과의 조우를 통해 비록 비엔날레의 작품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화가의 대중화된 작품들보다 덜 대중적이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 미술의 시류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는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IV. 현실 반영의 미술을 보다. (나머지 갤러리)
나머지 전시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감상했다. 도슨트의 설명은 끊겼고, 관객들은 각자 관람을 시작했다. 갤러리 1과 2에서 느꼈던 신선함을 찾기엔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작품의 대부분이 영상과 사진 미술이었기에 조금은 지루한 면도 있었고, 5분이 넘는 영상을 다 보는 것은 무리였다. 반성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2개의 영상물만을 보았다. 사진도 꼼꼼히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머지 갤러리에서 느꼈던 것은 작품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성매매 여성들의 편지를 조명으로 바닥에 드러낸 작품이나, 노사관계를 작품에 나타낸 작품 등에서 알 수 있듯 작가가 바라보는 현실이 작품에 담겨 있었다. 갤러리 1과 2에서 그런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 대부분의 작품은 현재의 현실 또는 과거의 현실을 나타냈다. 또한 갤러리5에서는 세계4차대전의 미래를 상상하고 현실화하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존재했던, 존재하는, 존재할 것 같은 그런 현실 반영의 미술이었다.
갤러리 1과 2에서 강조된 독특함과 공간미술의 미학 역시 그 자리를 잃지 않았다. 광주 시가지 전체를 모형화하여 나타낸 작품처럼 관객이 직접 걷고 느낄 수 있는 공간미술의 극치는 물론, 설문지를 작품화하는 독특한 작품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여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갤러리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신체적인 변화가 왔다. 페인트 냄새(신나 냄새) 때문인지 눈이 침침해져 왔고, 머리가 아파왔고 목이 탔다. 아쉬운 점이었다. 세계인의 예술 축제인 만큼 외국인도 많이 올 텐데, 전시환경에도 좀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V. 마치며.. - 배움과 깨달음을 많이 얻고.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판타스틱(fantastic)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나의 전시관(觀)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깨달았다. 유명화가의 작품들의 전시회가 있을 때만 미술을 좋아하는 척 했던 것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깨달음과 배움을 주었다. 배움의 즐거움은 과거에 수필에도 썼듯이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고도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라 나에겐 더 의미가 컸다.
비엔날레의 많은 독특하고 신기한 작품들, 단지 재미있고 신기하다는 관점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작품이니 내재한 의의가 있고, 그것은 작품 그 자체를 어우르는 것일 수도 있고, 작가의 상황과도, 세상의 현실과도 연관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문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문화읽기’의 방법이지만 미술처럼 시각화된 문화의 영역에서 생각하는 과정이 더 활발히 작동할 수 있기에 더욱 빛날 수 있는 것 같다. 다소 난해한 작품들을 바라볼 때, 이러한 문화읽기의 시각에서 편히 바라본다면 작품들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금기의 영역을 깨고 틀을 깬, 다양한 시각에서, 또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현재의 미술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그 특징을 느낄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같은 작품으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