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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 미완성된 한 인간의 고뇌의 현출이다. 나의 소중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겠다. 배운 것이 많지 않은, 삶의 경험이 부족한 한 인생의 살아 숨쉬는 철저하고 절박한 고뇌들의 모음일 뿐이다.

1.
사회 안에 던져진 나 - 불가피한 상호작용 속의 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며, 사회성을 강조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또 나누고 베푸는 과정 속에서 주체적인 나를 찾는 그 과정을 강조했던 것이다.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주체들간의 상호작용은 필수적이었다. 그것이 개인에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상호작용 하에 많은 역사의 진보가 있었다.

랑케는 확인할 수 있는 , 즉 사실만이 역사라고 하지만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가 내재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대한 해석은 역사가나, 역사가의 증언을 체득한 지식인의 몫이다. 상호작용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 사회에 있었던 사건으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상호작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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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발전해가면 발전해 갈 수록, 그 상호작용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 인종간의 상호작용도, 국가간의 상호작용까지 그 범위는 넓혀져 갔다 사회가 존재하는 한 상호작용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구성원들은 어쩔 수 없는 그 주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좁은 '사회'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호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상호작용이 없다면 사회 안에서 의식주를 충족시킬 수 없다. 상호작용을 통해 먹는 것, 입는 것을 구입하고 주거의 공간을 마련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 안에서 적응을 해야 하는 주체 중 하나일 뿐이다뭔가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마주침과 대화를 겪어야 한다. 그것이 싫어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 만들어 낸 양식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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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는 너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한 내 고민들의 시작은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전쟁사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역사 속의 상호작용이 당연한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결론은 살기 위해서는 불가능했다. 무인도에 던져지지 않는 한.. 내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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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존의 문제에서 대인관계의 성립.


사회 안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어떤 접촉이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상, 나의 행동으로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얘기처럼사회에 피투된 존재,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자아의 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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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확립은 당연히 내가 원하는 자아가 되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아나, 나부터 거부감이 드는 자아는 무의미하다. 상호작용도 이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상호작용이 내 자아의 확립에 부적합하다면, 그 상호작용은 거부할 수 있다. 인생의 선택권을 가진 주체로서 나를 위한 상호작용을 찾아, 나의 실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개별성과 주체성을 지닌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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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의 성립은 자아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사회에 던져져 버린 존재이기에, 앞서 말한 상호작용은 불가피하기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지내면서 사회 속의 나를 만들기 위한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대인관계가 쉬운 일일 수 없는 것이다
.

,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보다 더 잘 난 자아, 내가 만족하는 자아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많은 고민 중 상호작용이라는 과정을 답습하는 것이다.

실망스럽지 않은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린다. ''가 없다면, 대인관계도 없다. 결국 나의 실존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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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를 위한 대인관계 - 윤리적인 문제와의 갈등

왜 나를 위한 대인관계를 영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복잡한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자. 앞선 전제들이 모든 것을 뒷받침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 문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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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서, 자아와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해 대인관계를 영위한다면, 아무런 고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을 아무런 제약 없이 실현할 수는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인 도덕관념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관념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가운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법률로 규율된 문제의 정점에서 처벌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자아의 모습은 물론이요, 사회의 이상에 부합하는 양심적인 삶을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것도 정당한 자아를 추구하기 위한 본연의 모습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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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 속에서도 발생하는 상황은 내 행동이 윤리적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칸트가 말한대로 무조건 ''만을 추구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사회와의 약속, 즉 초견적인 의무를 실재화하는 과정을 겪는 단지 조건적일 뿐이다. ''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을 어떻게 맞추어 가느냐, 내 행동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할 것이다. 반드시 윤리적이라는 학구적인 표현이 거북하다면, '누군가에게 당당하지 못할, 또는 피해가 될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정당화하고 싶은 심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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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자. 그것은 내가 편하기 위한 거짓말이고 언제든지 나를 위한 정당한 거짓말이다. 근데, 상대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아챘을 때, 나는 상대에게 있어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혀버리는 것이다. 그건 설정되어 있는 윤리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고민이 무의식적일지는 몰라도 반드시 존재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드러내려 애쓰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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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기 싫은,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기 싫은 존재.. 실존에 합치시켜보면, 멋진 자아에 금이 가는 그런 대인관계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 망설이고, 때론 우유부단하며 때론 내가 하고 싶은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싫은 대인관계도그 인간한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기 싫기에, 윤리적 기준의 모호함을 없애고 싶기에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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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대로만은 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대인관계의 문제가 여기 있다넓게 말해 누구에게나 윤리적이고 싶은, 상대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면 어쩔까, 곧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결정되는 자아에 불필요한 오점을 남기기 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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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등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하며, 최소화하는 과정이 상호작용 속에 가장 현명한 방법이겠으나, 이를 최소화하는 노력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의 전개를 조금 보류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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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인관계의 방해꾼 - 오해(misunderstanding)와 편견(prejudice)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인 것이다. 대인관계 자체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윤리적 기준은 법이 규율하는 소수의 그것에 불과하다. A라는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를, B라는 사람은 나쁜 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대인관계의 애매함이다.

그 상대적인 윤리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방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오해와 편견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볼 수 있듯이 주인공들간의 오해는 남녀간의 사랑은 물론, 자매간의 우애 또한 갈라놓을 뻔 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어도 윤리적일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상대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나쁜 녀석이 되버리는 억울한 경우는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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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상적인 예로, 남자와 여자와의 서먹서먹해지기 직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황 : 남자는 여자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남자를 멀리 한다.

남자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여자 입장에서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행위를 나쁜 행위(이것이 윤리적인 것과 무관한 심리상의 문제랄지라도 여자 입장에서 나쁜 행동일 수 있다)라고 가정하고, 그 남자의 친절한 행동을 마음대로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남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에 결점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여자의 오해 때문에 나쁜 녀석이 되어버린 셈이다. 억울하다. 억울해도 상대적인 대인관계에서, 그 여자에게 선처를 바랄 방법은 없다. "그건 오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난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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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일. 이런 오해와 편견은 수없이 존재한다. 주로 부정적인 경험이나 자신이 읽은 글귀나 주변사람들을 통한 간접경험에서 생겨난다. 오해와 편견이 존재하는지 사전정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 무서운 방해꾼을 완전히 박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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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억울하다. 미스테리한 문제다. 어떤 철학가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오해와 편견이 왜 생기는지의 이유와,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정언명법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 그것이 발생하는 인간의 심리의 영역에서는 모두가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오해와 편견은 인간관계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참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 대한 고민은 참 어려운 고민이다. 나는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오해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들은 거짓이다. 이미 어떤 상호작용 속에 하나쯤의 오해는 존재할 것이다. 생각해볼 필요는 없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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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오해와 편견을 막으려고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행동한다거나, 편견을 없애기를 상대에게 종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내 버려두라.

예컨대 위의 예에서자신을 오해하는 여자에 대해 '이 공주병 여자야'고 한 번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음 울분을 삭인다. 오해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오해임을 깨닫는 순간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그 쾌감을 상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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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처받지 않는 자아를 위한 인간관계 - 내 멋대로 (가능할까?)

앞서 보류한 문제에 대한 답을 이제는 찾았다. 오해와 편견이 존재하는데, 무슨 인간관계의 윤리성을 운운할 것인가. 여기서 얘기하는 윤리성은 인륜에 어긋나는,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제외한 상대적인 윤리성을 일컫는다.

본질을 추구하기 위한 실존에서, 우리가 확립해 나가고 있는 자아를 위해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부속되는 것이 대인관계일 뿐인데, 나에게 흠집내면서, 내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해당 대인관계를 지속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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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대인관계가 최선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둘 중 어느 하나가 상처받아야 한다면 나와 타인 중 누가 더 받아야 하는가. 답은 앞선 얘기들을 통해 볼 때 당연하다. 남에게 상처를 줄 지언정, 나는 상처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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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내가 상처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는 되도록이면 일찍 정리하고, 미련을 갖지 않아야 한다. 왜 매달리고 집착하는가. 그 관계에서 과거에 얻은 것이 많았을지언정 내가 상처받을 수 있는 순간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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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멋대로 하면 된다. 남이 어떻든, 기분이 좋든 나쁘든 결론은 하나다. 나를 위한 인간관계, 나는 절대 상처받지 않는다는 마인드이다. 이런 마인드가 자리잡지 못한다면, 결국 힘들어하는 자아의 모습을 발견한다.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의 자아. 대인관계 속에서 상처받으며 고뇌하는 자아의 모습은 이 마인드가 확고하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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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더 이상의 고민의 여지는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래, 내 멋대로 하면 된다'



6.
그렇지 못한 인간나약한 존재.

(반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상처받으면서도 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그런 모습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다. 매조키스트라 칭하기엔, 너무 오묘하고 복잡한 문제이다. 상호 작용 속에 상처받지 않으면 되는 인간이, 또 자신을 위해, 상처받는 일을 택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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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하다. 확고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에 남에게 적어도 그렇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성선설적 견해는 부당하다남을 배려해서도 아닌, 자신을 위한 일이다. 나를 위해 불필요한 상호작용을 왜 제거하지 못하고 나약해져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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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외로움과 관련된 일이다. 현대 사회가 인간 소외의 시대이기에 실존이 강조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외롭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해 줄 것을 원한다.

외로움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읊조리자면 며칠은 더 걸릴 것 같기에, 일반적인 '외로움'이라는 사전적,문학적인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생각을 공유하고, 얘기를 나누고, 슬픈 일이 있으면 위로받을 수 있고,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축하해줄 수 있는 그런 관계의 필요를 원한다. 나의 필요에 의한 인간관계인 것이다.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한... 외로운 자아 또한 자신이 지향하는 실존하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인간을 외로운 존재라 얘기한다.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을 하고 (여기서 그가 여성편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외면해두자) 심지어 책을 읽고 지식을 탐구하는 것조차 고독한 존재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에서 왜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나는 이런 러셀의 견해에 찬동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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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인간관계에 적용해 본다. 인간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롭지 않은 자아가 되기 위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혹은 줄 수 있는 관계를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설령 그 가운데 오해로 인해, 혹은 상대의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 관계를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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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람들이 고민하는 수많은 인간관계들은 상처를 주는 대인관계의 존속에 대한 것일지 모른다이 인간관계가 종결되었을 경우, 다시 생기는 외로움의 감정과 고독의 흐느낌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자아를 원하지 않는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 또는 그녀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기에 우리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위하여 나약해지는 것이다.

 

7. 남녀간의 사랑 - 그 심오한 진리에 대하여.

 

외로움,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난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흥미롭지만 뚱딴지같은 화제를 하나 던져 본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떨까? 조금 다른 얘기로 생각해야 할까. 앞서 얘기한 인간관계의 연장선으로 생각해야 할까"

나는 후자에 한 표를 던진다. 더 나아가 그 정점이라 얘기하고 싶다.

 

실존을 확인하기 위한 상호작용 중 가장 큰 역할을 하며, 외적인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가장 포기하고 싶지 않는 인간관계가 사랑이다. 스스로 상처받는 길을 택하면서도 그 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내가 편해지는 길일지라도 사랑했던 대상의 부재를 잠시라도, 짧은 순간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그 고통을 안다. 그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내가 왜 실존하는지조차에 대한 의문마저 들 정도로 고통이 크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 고통은 있어서도 안 되며, 있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설령 고통을 겪는다 해도 감내하려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며 그것에 중점을 둔다. 결국 그 기다림과 이겨내는 고통에 지쳐 포기하는 순간,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한 후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종족 번식의 일환에서 출발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현대에 와서 너무 미화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가족제도와 사랑이라는 고유한 감정을 혼동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고유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연장선이다. 결혼을 통한 가족제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사랑은 누구를 위해서 하며 왜 하는가? 사랑도 인간관계이며, 나의 의지와 결단을 위한 자아, 결국 나를 위한 인간관계의 정점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한다.

Agape(
아가페) 같은 사랑을 만들어내고, 김하인 소설에 등장하는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을 따라 하려 한다자신을 희생하는 것 또한 자신이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자기만족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랑을 받는 기쁨 또한 내가 누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통한 자기만족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에 발생하는 자기만족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한 사랑'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또한, 우리가 그것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는 아이러니함을 찾을 수 있다.

'
나는 나를 위해 사랑하거든'이라고 드러내놓고 한다면 무슨 사랑이 아름답겠는가.

 

사랑도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다. 단지 발전된 인간관계임을... 그것이 전부인데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지고 말았다.

 

 

8. 물음 - 강요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지향점

 

앞서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이용한 바 있다. 그렇다, 우리가 행동하는 수많은 것들은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자신이 자아를 위해 그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모르는 때도 있다. '자아'를 위해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어쩌면 부정하고 싶은 얘기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인간관계를 접한다. 앞서 얘기한 사회 속에 던져진 나의 상호작용은 필요하고, 그 안에서 내가 선택할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해야 하는 관계는 나의 결단 속에서 결정되고, 관계의 시작 또한 마찬가지다사람은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부재나 떠나감을 쉽게 극복해내지 못한다. 그것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설령 부끄러운 일이라고 각인할지라도 쉽게 그 감정을 버리지 못한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내가 의식하지 않는 상황에서 많은 것이 발생하는, 결정되어지지 않은 것이다. 누구와의 상호작용을 하게 될 것인지의 문제는 하늘이 결정할 문제이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더불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선택권만이 있을 뿐이다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자신의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그 인간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자도 자연스러운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지속하기 싫다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느강에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단지 내가 편해지는 방법을 택하고자 해야 하는데,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나약해지며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찾아야 하는 지향점이 각기 다를 뿐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렇게 해라'는 지침은 한 실존하는 자아의 부정을 강요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모든 문제의 선택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곧 다른 지향점을 강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공하는 인간관계를 위한 10가지 방법' 따위의 쓸데없는 글귀는 포장된 그럴듯한 이상에 불과하며 인간관계의 자연스러움을 깨닫지 못한 자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구속받지 않는,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는 당연하며, 그것이 설령 자기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본인의 선택임을 알면 그것으로 족하다.

 

 

9. 인간관계에 대한 결론 - 자연스러움

 

결국 대인관계에 대한 답은 하고 싶은대로 하되, 상황을 부정하지 말고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인간은 행동과 결단으로 자아를 형성해나가는 존재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 고통을 받는 것도, 상처를 입는 것도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으로 인한 득실은 자신만이 알고 있을테니 말이다.

 

여기에서까지 상대성의 논리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법칙이나 공식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내가 윤리적인 문제나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되, 그것이 내가 바라는 인간관계인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될 뿐이다. 그 고민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며, 사회 속의 인간관계에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인 것이다.

 

반드시 인간관계에 대한 결론을 한 마디로 압축해야 한다면 "자연스러움" 정도로 해 두고 싶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과 인생 속에서 수많은 자연스러운 관계들 속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느끼고 즐기고 외로움을 피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실존하는 나를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그리고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로 이루어진 원이 완성되면, 그 원 안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Epilogue (에필로그)

 

많은 고민을 했다. 수많은 고민을 글로 표현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 보다 적절한 경험들을 얘기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무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경험에서 내린 결론이 아님을 얘기하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진심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원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관계였을 수는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를 만난 사람들 모두가 나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존재했다면, 그 인연을 택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그 인연이 떠나감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서운한 감정이나 나의 외로움을 부추기는 관계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남에게 상처주는 방법을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나에겐 불가능한 문제다그냥 무조건적으로 슬퍼하지 않으려 한다.

거짓말이라는 상대의 비윤리적인 행위에도, 가끔 쌓이는 오해 속에서도 그것을 풀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또 그 인간을 못된 인간으로 규정한 채 아쉬워하지도 슬퍼하지 않으려 한다내가 외로운 존재이고,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단절이라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불어 살아가기를 택한 것과 같은 이치에서..  


이 또한 내가 선택한 실존하는 나를 만드는 나만의 방법인지 모르겠다.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끊어야 하는 인간관계, 내가 상처받아도 꼭 지키고 싶은 인간관계, 혹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노력 등은 나만이 알고 있는 문제이고,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 웃는거야..

추천곡 : 웃는거야 "서영은"